§ 『제1장. 십자가 아래 서다』 p. 17-27 중에서
교수님,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지 한 해가 지난 어느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그 가을은 저에게 정말로 특별한 은혜의 계절이었습니다. 그 가을에, 저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만져 주심(touch)을 경험했고, 복음의 광대함에 눈 뜨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매일 매일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는 기쁨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변화 속에는 기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진리의 찬란한 빛 앞에 그동안 가려져 있던 조국 교회의 실상과 저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의 실체가 발가벗겨진 채 드러났고,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 기쁨과 안타까움이 저로 하여금 새롭게 발견한 진리의 빛을 신학교 학생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만들었고, 그래서 저는 그 내용을 출력물로 만들어서 제 강의를 듣던 신학생들에게 읽혔습니다.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출력물을 나누어 주며 과제로 독후감을 써 내도록 했는데, 돌아온 리포트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겉표지와 타이핑은 정성스러웠으나, 내용은 독설로 가득했던 그 리포트 안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교수님,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이런 이야기를 뭐하러 신학생들에게 읽도록 강요하시는 겁니까? 신학생 가운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런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교수님 혼자서 한국 교회를 다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은 태도가 제게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리포트 때문에 학점이 안 나와도 좋고……. 우리를 뭐로 보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리포트의 내용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하시려면 얼마든지 저를 부르십시오.”
두 번째 출력물을 읽고 제출한 리포트의 내용도 대동소이하였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반감과 거기서 비롯된 인격적인 도전과 항의로 가득 찬 글이 독후감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검토할 때 내용을 먼저 보고 점수를 결정한 다음 리포트 겉표지의 이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리포트는 일부러 이름을 확인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독설에 찬 내용을 읽으면서 그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면 마음으로 그를 미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피 묻은 리포트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제 연구실 책상에는 세 번째 과제물에 대한 리포트가 올라왔습니다. 예전의 그 표지와 똑같은 모양의 과제물 하나가 눈에 띄었고 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저를 상심케 했던 그 학생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이름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과제물의 겉표지를 넘겼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자료를 복사해 두지 않아서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자신의 독후감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내가 왜 이럴까? 앞서 두 번의 과제물을 자신 있게 써 내려갔던 내가 지금은 무릎을 꿇고 있다. ……교수님, 저는 누구입니까? 혼란이 일어납니다. 제가 알던 기독교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난번처럼 비판을 하기 위하여 출력물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피가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 서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저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견딜 수 없는 제 신앙의 경박함 앞에서 저는 울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았습니까?”
말하자면 그 학생은 십자가를 만난 피 묻은 손으로 리포트를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그때 세 번째로 학생들에게 읽힌 출력물은 바로 제가 교회에서 행한 여덟 편의 십자가 설교였습니다(당시 원고들은 몇 해 후 십자가를 경험하라(생명의말씀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신문 용지 같은 질 낮은 종이에 조잡하게 인쇄된 글을 읽으며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만났을 때, 과거의 신앙의 틀이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과 회복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를 새롭게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잃은 강단
오늘날 십자가의 감격에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은 조국 교회의 강단이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며, 강단이 이 두드러진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을 그치고 있는 것은 설교자들의 가슴 속에서 복음의 감격이 역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영광스러운 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꼭 필요한 선포의 주제들을 버리고 꼭 필요하지 않은 주제들을 설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국 교회의 이 같은 영적 상황은 복음에 대하여 냉담한 설교자들과 안일하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선호하는 교인들이 이루어 놓은 합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기독교에 대하여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사상과 철학은 변하여도, 인간 풍조는 갈리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각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악 된 길을 걸어감으로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버림받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먼저 알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조차도 낯선 이들의 종교에 대한 기록일 뿐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불타는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만 세상에 속한 헛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점점 십자가를 묵상하고 감격하는 일들을 잊고 살아갈까요?
불꽃같은 사람들
제게는 특별한 재주나 탐닉하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좋아하는 일은 하나 있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믿음의 선배들의 생애를 읽거나 듣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들이었던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유혹과 세상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의 생애를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처하게 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찮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등지고 세속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구 한 모퉁이 다른 곳에서는 주님을 한없이 사랑했기에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위해서 넘치도록 수고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든지 저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룩한 삶과 영광스러운 헌신을 본받아 살고 싶습니다.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피부 색깔도 같지 않지만, 이런 생애를 산 사람들의 신앙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 비범한 신앙
그들이 넘치도록 수고하는 가운데서도 일에 치이는 대신 거룩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은 사람들로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한때 십자가를 체험했을 뿐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사랑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는 십자가의 감격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공에 미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들이었으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사랑에 불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안에 있는 비범한 신앙 때문에 비범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특별한 헌신 속에서 살게 했던 비범한 신앙은 곧 십자가에 대한 남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단지 한 번 체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와 거기서 이루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매 순간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안팎의 대적과 싸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에 대하여 11세기를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지셨네.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것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우리의 인생이 주의 것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오직 순결한 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그 사랑의 위대함을 아는 법입니다.
순결하고 완전한 영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깊이 사랑하겠습니까? 만나지도 못한 구세주를 위하여 어찌 마음을 바치겠으며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와 고난 신앙
성경책의 가장자리 부분을 붉은 색으로 칠한 까닭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순교의 붉은 피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펴서 복음 진리에 접하는 순간마다 자신에게까지 도달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순교자들의 피 뿌리는 헌신을 통하여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가장자리를 붉게 물들인 성경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금박으로 물들인 성경이 유행하는 것처럼, 고난과 희생보다는 현세의 번영과 성공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성도 클리페인(Elizabeth C. Clephane)은 십자가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피 묻은 복음을 가슴에 품고 불꽃같은 구령의 열정으로 어두운 땅들을 누볐던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십자가와 그들의 생애는 나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절망적인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목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믿지 않는 불신의 땅에 복음 전하는 자로 파송한 것은 자신의 갸륵한 종교적 결심이나 한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고난과 핍박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한 것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살아 역사했던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와 관계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났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제가 하나님을 만났느냐고 묻는 대신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묻는 것에 각별히 유의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있게 마련이고 만약 그러한 간증조차 없다면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자체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나름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십자가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개인적 간증과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의 만남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잘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낯설다면,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나머지 모든 신앙의 경험들도 모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은 지금 당신으로 하여금 불꽃처럼 살게 하기에 충분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불신의 땅에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셔서 죄에서 구원해 주심은, 우리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의 불신앙을 능가하는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하여 살아야 할 존재들임을 자각하는 현재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