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성경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모할 대상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오락기를 좋아한다. 남성들은 야구나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좋아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게임에서 이기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여성들은 쇼핑을 좋아한다. 자신이 갖기 원하는 것을 사모한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우리가 구입해야 할 필수품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좋아하다’보다 더 강한 의미는 ‘사모하다’이다. 이 시대에 성도는 무엇보다도 간절히 여호와를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한다. 부흥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은 부흥을 사모하는 것이다. 영적인 배고픔이다. 우리의 영적 목마름이다. 우리 구역원이 올해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부흥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우리 구역은 놀라운 부흥의 현장이 될 것
이다(p.15).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성도들이 가장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그릇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상습적인 죄악의 삶을 즐기면서 신앙이 자라나기 원하는 것은 모순이다. 세상의 죄를 탐닉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것마저 습관화되어 버린다면 성결의 계단을 오를 수 없다. 육체의 재미에 탐닉하게 되면 거룩함이라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쁜 습관을 끊을 수 있도록 날마다 결단해야 한다. 습관의 다음 단계는 중독이며 중독은 완전한 자기 파괴로 나아가게 한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룩해지기를 중단했다. 그것은 거룩해지려는 노력이 때때로 더 큰 낙심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룩함은 내적인 갈등을 수반한다. 이것은 거룩한 갈등이다. 자주 실패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노력을 기뻐하신다(p.31).
성도의 위로와 능력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에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삶 가운데서 마음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곧 십자가를 생각했다. 그는 “피곤함과 짜증, 괴로움, 분노와 갈등 등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인내를 생각하면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의 멍에를 메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자. 탕자같이 방황했던 어거스틴도 주님 품에 안긴 후에야 참된 평안을 느꼈다고 하였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안식이다.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음은 영혼에서 솟는 편안함이요, 기쁨을 의미한다(p. 52-53).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물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미래는 알 수가 없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우리가 언제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바로 지금이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몇 년 지나서 생활이 안정되고 난 이후가 아니라 지금이다. 언제 자녀와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갖기로 결정해야 하는가? 지금이다. 언제 아내와 남편에게 “수고했어요! 당신은 정말 나에게 좋은 사람이에요.”“ 사랑해요.”라고
말해야 하는가? 지금이다. 언제 사랑하는 부모님들을 신앙생활 하도록 교회로 초대해야 하는가? 지금이다.